남의 이야기
팔목의 암호에 대해서는 해독하지 않기로 한다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0. 10. 17. 08:05
팔목의 암호에 대해서는 해독하지 않기로 한다
비단보다 부드러운 살갗,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길이
뻔뻔해서 더욱 맘에 드는
어느 골목이 이리도 낯설까
그럼에도 기어이
가보고야 마는 끝
돌아오는 발목에서 부터 복숭아빛 저녁이 잠든다
그 곁에 말 한마리 풀어 놓고 열심히 가을 옆구리에
파고 들어 이미 어둠이 풀린 초원에 가깝게 입김에 젖어들게 한쪽 눈만 간신히 뜨고
밤 안에서야 겨우
되살아나는 열을 감지한다
이 가을에도 이제 막 첫생리를 시작한 소녀처럼 안기는 것이 있어 나는 또 잠시 싱그럽고
발정에 가까운 붉음이랄지라도 수줍음을 지워낸 뻔뻔한 골목의 끝에서 여자로 서 있다는 것에
울렁일 수 있어 나는 또 잠시 울컥한다
만져지지 않는, 닿지 않는 섬으로 오래 있던 자리에도 꽃이 피었다 가을은 오고야 마는 것을...
행여 새벽 바닷가 어떤 발길 하나가 따스했던 날이 떠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겨울이 지나는 숲
어디쯤에서 봄은 다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 섬의 일
유난히 팔목의 동맥이 갓 잡힌
물고기 처럼 팔딱거리는
날들이기에 잠시 손을 내어 주어도 온기를 내어 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을은 점점 감긴
내 눈동자 처럼
더 가운데로 가라앉는다
나의 계절은 여름에서 시작하여 가을로 가서 겨울에서 잠시 넘어졌다가 다시 봄이 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