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바람의 행적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1. 10. 23. 11:03

 

 

 


바람의 행적

 

 

내 안의 바람이 잦아들 쯤
나는 모든 걸 버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바람 부는 쪽으로 향하던 걸음걸이도 느슨해져 이젠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을 눈치챘다
도대체 바람의 나이는 몇 살 일까

규리 낭자가 내 머리를 빗길 때 미세한 진동을 느끼곤 한다
그건 바람이 아니라 심장의 맥박 이리라
가을 국화가 지천인 어느 집 뜰 안으로 붉은 칸나 한송이가 피었다
나도 한때 붉었을 적이 있었는가
가물가물하다

농염이란 말은 이미 우주 밖으로 떠돌고 있을 텐데
칸나의 붉은 입술을 보고 나는 잠깐 착각을 한다
가을이니 용서가 된다
빛이 저물고 귀가하는 저녁
사람들의 발걸음이 무겁다
열심히 일해서 얻는 노동의 무게가 아름답다

놀이터의 아이들이 재잘거린다
참새들도 함께 논다
바람의 아이들은 늘 세상 안쪽에 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나는 그 언저리 어딘가에 서성거린다
바람은 지나간 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