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야기

끌리는 시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14. 7. 10. 15:27






              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길 기다렸다.

              옥수수 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 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을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 여든 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 가끔

              들 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 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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