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야기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15. 3. 19. 09:41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


      <림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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