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야기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이생진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5. 1. 28. 09:14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 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 버려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남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고정희  (0) 2024.01.30
화분  (0) 2023.06.06
비 오시는 날  (0) 2023.05.06
마지막 카톡  (0) 2022.10.12
팔목의 암호에 대해서는 해독하지 않기로 한다  (0) 2020.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