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사망유희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2. 10. 3. 23:47



DHL 특송편으로 우편물이 도착했다
발신지는 스위스 바젤 ‘엑시트 인터내셔널’이란 단체에서 보낸 문서였다

[귀하의 부친께서 현지 병원에서 사망하시어 화장후 분골 처리 하였으니 망자의 납골함과 함께 30일내 유품을 수령해 가시기 바랍니다<영문 해석>]

아버지가 친구분과 함께 스위스로 여행가신지 2 주만에 날아든 비보였다
자초지정을 물을 새도 없이
여행사에 스위스행 티켓을 예매했다
출발은 3 일 후로 잡았다

다음날 아버지의 절친이자 이번 여행에 동반자인 광수 아저씨의 큰딸 은경씨 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와 똑같은 사망 비보를 받았다는 것
순간 머리를 강타하는 듯한 예감이 뇌리에 스쳤다
사전에 면밀히 계획된 동반 자살의 유형임을 직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은형씨도 동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같은 일정의 항공편을 예약하기로 했다

알아본 바로 스위스에서 인정하는 존엄사의 비용은 일인당 이 만불선이라고 들었다
두사람 분의 4 만불 안팎 비용 전부를 지불한 이는 아버지였다
친구분은 형편상 지불 능력이 없었을 것이므로
아버지가 친구분을 꼬셔서 같이 동행하셨을 것으로 추측 되었다
이것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사망 유희였다

조작된 국내 모 대학병원 전문의의
말기 췌장암 진단서와 소견서는 물론 돈으로 만든 블로커의 조작된 거짓 문서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바르비투르산염' 진정제를 처방 투여 후 안락사를
실시한 엘링턴 종합병원도 페퍼 컴퍼니 같은 종류의 허위 병원인 듯 싶었다

고인의 위품 수령 절차는 간단했다
헬링턴 병원의 총괄과에서 수령한 망자의 납골함과 유서 형태의 자필 편지와 간단한 소지품이 들어있는 여행가방이 전부였다
친구 아저씨도 마찬가지 였다
수령확인서에 은영씨와 나는 각각 보호자의 서명을 했다

호텔로 돌아와 나는 아버지의 유서라는 편지를 개봉하여 읽기 시작했다
편지는 두 편 이었다

<아들에게>
나는 못해본 것, 안 해본 것 없이 인생을 즐기며 자유롭게 살았다
그래서 남은 生에 대해서는 손톱 만큼도 여한이 없다
그러니 나 죽거든 슬퍼 마라
이만큼 산 것도 축복이니 절대 서러울 일 아니다
묘비도 필요없고 봉분도 필요없다
그냥 훌훌 태워서 '다불리'
개망초언덕 바람부는 쪽으로 뿌려다오

이까짓 변방 촌부를 누가 기억이나 하겠냐만
뒷전으로 한세상 슬며시 왔다가는 가랑잎 같은 신세였으니 기억조차 있을리 없을거다
더들 재밋게 놀다 천천히들 오거라

내 육신은 슬퍼도 말고 추억도 말고
그냥 낙옆 태우듯 태워서
바람결에 훨훨 날려 버리면 된다
들녘 바람이나 되겠지
행여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질펀하게 새로 한번 살아 보자
나를 기억할땐 나쁜 것만 기억 하거라
그래야 쉽게 잊지 않겠니

나 죽으면 슬퍼말고 잘 갔다고 박수쳐 주길 바란다
박수 받으며 떠나고 싶다

사랑한다 아들아ᆢ


<나의 지인 들께>
어느 날
매일 올라오던 글이 안 보이면 먼 길 떠난 줄 아시오

그렇다고 그날로 내게서 발길 뚝 끊지 마시고
삼천 오백 편의 詩를 거슬러 읽으며 흘러가 봐 주시오
그러면 삼천 오백 일이 걸릴 것이고
나는 오랜 날들을 더 그대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없이 좋겠소

어느 날
나의 詩가 안 보이면
먼저 간 줄 아시오
그동안 함께해 주신 그대들 덕분에 행복했소
그 힘으로 여념 없이 글을 짓고 용기 내어 살았소
그러니 그대들은 나의 은혜로운 수호자들 이요
고마웠소

먼 길 떠나면서
생면부지의 그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이 세상은 결코 외롭고 고통스러운 바다는 아니었음에 감사하오

잘 들 계시오
그대들과 함께여서 정말 좋았소
행운이고 축복 이었소

내가 어느 날 잠잠하거든
여행 떠난 줄 아시오
돌아온단 장담은 못하오
사라져 갈 뿐이오
잊혀져 가려할 뿐이오

내 글들도 차차 잊혀지길 바라오
세상에 욕심 따위를 남기면 안 될 것 같으니 하는 말이오

그대들과 함께 한 세월이 정말 좋았소, 행복했소
안녕히 잘들 계시오ᆢ

두분 모두 무모한 배짱들 이셨다
어떻게 안락사를 인정하는 스위스까지 가서 생을 마감할 생각들을 하셨을까
본인들은 홀가분 할지 몰라도 남은 자식들은 천하의 불효 막심한 죄인을 만들어 놓고 가신것 아닌가

아버지는 늘 아픈 것이 죽는 것보다 두렵다고 입버릇 처럼 말씀 하셨고 장기간 병치레로 자식들을 고생시킬까봐 쓸데없이 미리 전전긍긍 하셨다
이 모두는 자신보다 가족들을 위한 터무니없이 과장된 무모한 배려였다

아버지의 사망소식은 며칠후 OO 일간지 사회면에 여섯줄 기사로 짤막하게 보도 됐다

망자는 마지막 죽기전에 의료진에게 '고맙다' 는 말을 전하며 영면에 들었다고 병원측은 전했다

아버지의 사후 잔여 금융재산은 보험상품과 정기 예금등으로 나눠져 이 억원가량이 통장에 남아 있었고
개포동 아파트는 어머니의 명의로 되어 있으니 모친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은경씨는 광수 아저씨의 존엄사에 들어간 비용을 한사코 갚겠다고 했으나
아버지가 결정한 사항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정중히 고사했다

아버지의 분골 가루는
아버지의 유언과 달리 장례 절차없이 고향 태안반도 끝자락 그믐날 밤바다에 몰래 뿌려져
깊은 심연속으로 스며 들었다

그러나 이 유골함이 진짜 아버지의 분신인지
아니면 알프스 어느자락에 아직도 살아 계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유전자 검사를 대비해 분골가루 소량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버지 죽음의 경로를 따라 스위스 행 행적을 추적해갈 세부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이 사건의 전말에 어떤 비화가 숨겨져 있었는지를 파헤쳐 보기 위해서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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