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다리는 사람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0. 5. 8. 07:22

 




                기다리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했던 사람이다

                라일락 향기가 질때쯤이면 늘 장마 오기를 기다렸다

                유월의 그 음습한 장마동안 서로를 사랑했다

                 

                소설책처럼 아주 오래된 방에서 묵었던 남한강가는 싱그러운

                풀냄새를 풍기며 여름 한복판으로 익어갔다

                길목에 개 복숭아가 익어 무게에 겨워 늘어져있고 城처럼

                우뚝솟은 오래된 집에

                문패를 가리고 들락거리던 격정의 시간들

                 

                사내와 여자는 세월이 지나며 서서히 늙어갔다

                죽음을 생각할때 서로를 살려낸 우산같던 사람

                늙은 여자가 요양원에서 한시절 호우처럼 지나간 옛 남자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청계와 관악이 만나는 경마장 어귀쯤 시냇가 여울목은

                수초를 머금고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다

                늙은 남자는 애처롭게 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여울목 중간에 팔뚝만한 잉어떼들이 수초사이로 헤집으며

                상류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여자는 휠체어를 타고 섬처럼 박혀있다

                이젤위 캔버스에는 아주 오래된 유화 한점이 올라앉아 있다

                쥐죽은듯 그림을 바라보는 여자의 촛점잃은 눈동자속에

                카리브해의 저녁 노을이 비췄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의 여자가 사내를 찾고 있다

                늙은 여자는 치장하듯 흰 머리를 연신 반복하여 매만지고 있었다

                외곽순환도로 북쪽끝 구리를지나

                퇴계원 쪽 도화숲 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같은 요양병원이

                봄비를 맞고 서 있다

                 

                창틈 사이로 이팝 꽃은 진저리치듯 희고 눈이 부셨다

                그토록 봄 몸살로 몇일간을 누워 있었을때

                요양원 테라스에서 등을 보이고 하염없이 봄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사람

                 

                납골당 왼쪽 숲길에 초여름 흑빛 장미가 향기를 내뿜고

                있었고 사진속 중년의 여자가 마른 웃음으로 웃고 있다

                문상을 마친 늙은 남자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채 요양원

                밖으로 요요히 걸어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사랑했던 사람을 오래오래 잊을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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