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쉰밥을 먹다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0. 7. 8. 18:01


쉰밥을 먹다

눌은밥을 끓여놓고 깜빡하고
짬뽕 먹으러 나갔다
실컷 한나절을 싸돌아 다니다가
시장에 들러 감자, 오이, 복숭아를 사들고 귀가 했다
눌은밥을 다시 끓여 오이 짠지와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려고 한술 떳는데 살짝
쉰내가 난다
버릴수가 없었다

어릴적 산동네에서 우리집만 세끼 쌀밥을 먹었다
다른 집들은 대부분 옥수수 죽이나
감자밥, 밀가루 수제비를 먹었다
더 어려운 집들은 점심 끼니를 거르는 집도 더러 있었다
나는 이웃집 친구들이 먹는 옥수수죽이 참 먹고 싶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엄마는 쉰밥을 찬물에 말아 쉰맛을
헹궈내고 무우 짠지와 함께 드셨다
쌀한톨 개숫가에 떨어지거나
밥그릇에 밥풀하나 남겨도 호되게 꾸중듣던 시절
새 밥은 나를 주고 묵은 밥은 물에 헹궈 쉰밥 먹던 엄마
생각이 난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는 쉰밥을 먹는다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엄마처럼 오이 짠지와 함께
눌은밥을 먹었다
요즘 사람들이 알면 천하에 미련한 멍청한 짓이라고
놀려대겠지만
나는 쉰밥이라고 버릴수가 없다

나는 오늘 쉰밥을 먹는다
산동네 시절 엄마가 먹던 쉰밥
내가 지금, 그때 엄마보다 훨씬 노땅 이 되었으니까
쉰밥 먹어도 그렇게 큰 수치가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쉰밥을 먹어도 배는 부르다

옛날 산동네,
우리집은 간데없고 낯선 아파트촌이 빼곡히 차 있다
옥수수죽 배급하던 예배당도
이젠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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