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방인/김낙필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1. 7. 28. 15:09

 

 

 

이방인

 


기억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니 뒤뜰의 능소화도 어느새 목을 제다 떨구고 말았습니다
슬픔을 주렁주렁 매달고 살던 사람이
먼바다를 건너갔을 때도 한 여름의 가운데였을 겁니다

고해성사를 하듯 음악을 켜놓고 섹스를 합니다
아무런 교성도 없이 엄숙한 성사를 치룹니다
서성거리던 늑대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밤에는 속죄를 하듯 깊은 잠만 잡니다

감정의 촉수가 무뎌질 즈음에 여름이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넋두리처럼 운명을 비관하던
그 사람의 소식이
바다 건너왔습니다
감정의 빛은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쾌락, 종착역, 비밀, 공유, 수치심 등등의 관계가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이 모두가 소모라는 것을 그 사람은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소름 돋게 전율하던 교위의 예술도 결국 소모였다고
말합니다
방치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뿌리처럼 다른 나무가 되기로 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소모였다니요

가을입니다
다 소모하고 떨구는 잎처럼
비어 있습니다
못 잊을 것을 잊고사는 일은 힘겹습니다
그사람이 다시 바다를 건너가고
파도는 멈췄습니다
바람들이 뒷곁으로 몰려가고
기억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먼 밖으로 그 사람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자기 연민을 합리화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숨 막히듯 떠나갑니다

달빛 아래 무덤의 비석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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