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사평역의 봄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4. 4. 4. 08:11



세상의 봄은 몇 번이나 더 올까
막차 탄 사람들은 종착역을 궁금해한다
연탄불에 밴댕이 구워 먹던 시절을 회상하는 사람들은 사실 봄이 오는 것이 두렵다
꽃은 지기 때문이다

9 호선에도 사평역이 있다
눈 퍼붓는 역사 안에서
석탄 난로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밤을 밀어내던
그 사평의 방랑자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종착역에 거의 다다랐을까
거긴 어디쯤일까

서러워하며
다가올 봄을 셈하지 마라
사평 살 때가 좋았느니라
길 건너 추어탕 집에서
어리굴젓에 소주 한잔 걸치고
뉘엿뉘엿 터미널로 내려오면 갈 곳이 사방 천지였다
목포, 여수, 삼천포, 부산, 통영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먼 사평에는 사시사철 눈만 내리고 기차는 오지 않았다
우리 동네 사평역에는 봄이 와 이른 산수유가 핀다
목련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개나리도 지천이다

그럼 뭐 하냐
갈탄 때던 사람들은 다 죽고 없는데
기름값이 비싸서 온방도 끊고 솜이불 쓰고 사는 사평 사람들아
봄을 기다리지 마라

안 온다
영영 봄은 안 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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