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감으면
뺨으로 스쳐가는 소슬바람
청계 봉우리위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사람들은 천변을 걷고 뛴다
비 온 뒤라 냇물이 투명해졌다
하루가 저무는 저녁 길을 나섰다
입을 다문지 오래됐다
말이 없어지니 쓸 것이 많아진다
쓰기 위해 산다는 生字 시인처럼
나도 그 길을 따라가는 듯싶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입은 다물었지만 아직도 할 말이 많다는 것은 살아있음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만사를 잊고 보면 아름다운 세상
모든 만물이 다 아름답다
말년에 오는 이 깨달음이 얼마나 고마운가
불만 투성이던 세상이 이렇게 찬란했다니 놀랍지 않은가
사람도 나이가 차면 得道를 하는 모양이다
어수룩한 聖人이 되어 간다
눈을 감는다
주마등처럼 세월을 되감아 본다
길고 길었던 시간이다
사구실 고개를 엄마등에 업혀 넘던 달밤과
황포 돛대가 드나들던 마을 어귀
소금밭의 나문재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
카사블랑카, 그라나다,
보스포루스 해협ᆢ
모두가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었던가
가을 산책길
스산한 바람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