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를 건너간 사람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4. 5. 23. 05:43



오늘은 나를 건너간 사내가 보고 싶다
그 사내가 한 말도 기억난다
'지금은 뜨겁지만 훗날 식어도 우리 서로 원망하지 말기'
그리고 이십 년이 흘러갔다

밤이 오자 광안대교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다리 밑으로 유람선이 떠 다닌다
불꽃으로 볼이 붉어졌다
오늘,
화려한 불빛들이 밤을 밝힌다
어둠 속 수평선이 보이는 곳에 그 사내가 웃고 있다
세상 끝까지 나를 데려다줄 것 같던 사내는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졌다
생사도 모른 채 기억 속에만 살아있는 사내
태풍도 허물지 못한 사내가
밤바다에 둥둥 떠 다니고 있다

허리를 풀면 둔덕 사이로
노를 저어가던
바다내음 가득한 오륙도 선착장에서
물질해 잡은 전복이랑 해삼이랑 뿔소라를 안주삼아 대선소주를 열병씩이나 까던 짧았던 시간

사라진 시간을 지키는 그 사내는 기억하고 있을까
청사포, 용궁사를 돌아 나와 달맞이길 사라진 언덕 아래 사내는 아직도 담배를 피우며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는지
운명선을 같이 탔던 우리는 길동무였지만 사연은 묻지 않았다
귀로에서 만난 그저 좋은 친구였다

오늘은 그 남자가 보고 싶다
바다가 한없이 뒤척일 때 나를 위로했던 사람
죽음을 불러내 무작정 강가를 걸을 때 손을 잡아준 사람
하룻밤쯤은 뜨겁게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

내가 건너가고 나를 건너간 기억들
오늘 밤바다를 보며
먼 데서 오는 뱃고동 소리를
듣는다
소리는 그 남자의 발자국 소리다
볼을 타고 흐르는 강물이 그날처럼 따듯하다

무모했지만 아름다웠던 나의 사내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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