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리
이스탄불發 터키항공 K0088機 유리의 좌석은 스탠바이 상태다
친구 연희와 수연이도 좌석을 배정 받지 못한채 함께 대기중이다
전산 오류인지 업무 미숙인지 우리팀 31명중 7명이 스태바이 상태로
대기중 이다
내일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회사로 출근하려 했는데 이미 출발시각 4시간
딜레이에 좌석까지 보류 상태이니 계획은 물 건너간 상태이다
뭔ᆢ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는걸까?
탑승종료 10분전까지 스탠바이 중이던 7명의 승객중 친구 연희와 수연을 포함해
6명이 좌석이 해결되어 보딩패스를 받고 탑승했다
앞서 탑승구로 들어가는 친구들은 안절부절하며 혼자 남겨진 나를보며 불안해 했다
나는 곧 뒤따라 갈테니 안심할라며
손을 흔들어주며 보냈지만 내심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좌석은 이미 풀로 차버린 상태
마지막 1명 유리만 보류 상태 이다
순간 불화 같은 유리의 성격이 폭팔했다
나는 터키항공 이 비행기 안 타겠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이미 예약된 내 좌석을 남에게 주고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
정식적으로 항공사에 크레임을 걸겠다
정신적 물질적 손해보상과 너희의 불손한 행동 모두 사과 받겠다
만약에 나만 놔두고 350명 승객이 이륙한다면 가만히 않있겠다
핸드 캐리용 캐리어를 들고 탑승 출구 반대쪽으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항공사 직원들이 달려와 길을 막고 붙잡았다
싱갱이 끝에 결국 유미는 터키 항공사 임원의 한좌석 남은 비지니스 좌석을
낙점 받았다
항공사 임원의 일정을 다음 비행기로 미룬 응급 조치였다
기내에 들어가 우선 이코노믹 좌석쪽으로 가서 친구들을 찾았다
중간 좌석쯤에서 수연과 연희가
손을 흔들며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 내 이름을 외쳤다
홍유리!!!
나는 손가락으로 비지니스칸을 가르키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좌석으로 찾아와 앉은후 안도의 숨을쉬며 좌석 안전벨드를 맸다
유리는 탑승하고도 달아오른 불화를 삭히지 못해서 한참을 혼자서
진정시켜야 했다
기내식 두끼니를 먹고 10시간을 날아와 오후 네시반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수화물을 찾아 시내로 들어가는 리무진에 올랐다
서울에 날씨는 어느새 떠날때와는
다르게 완연히 추워져 있었다
꽃씨를 받다가 너를 생각했다
한때 네가 꽃처럼 예뻣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도 그때는 꽃처럼 철이 없었다
해마다
철따라 피는 꽃들에게 그저 고마웠다
지금 언덕에 구절초가 한창이다
하얀 네가 생각났다
세월은 모든것을 희게 한다
머리카락도 기억도 추억마져도
하얗게 발색 시킨다
그래도 잊기지않는 것은 오직 너 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희다
저기 밭둑으로 가는 너도 하얗다
꽃밭에서 사루비아 꽃씨를 받다가
너를 생각한다
지금 네 동산에도 가을 꽃이 활짝 피어있겠지
네 웃음처럼...
여행가방을 풀다 책 한권이 풀썩 떨어졌다
"그대의 작은 바람숲"
나는 그다지 책을 읽지 않는다
인터넷 모바일 책방에서 필요한 책들을 선택해 보는 편이다
특히 소설은 별로다
주로 수상집이나 에쎄이집을 읽는 편이다
파묵칼레로 이동중에 뒷 좌석에서 머라이어캘리의 "My All"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후속곡으로 째즈, 쏘울풍의 듣도 못한 음악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멋진 음악들 이었다
돌아보니 늙은 아저씨가 카스뮤직을 듣고 계셨다
"저ᆢ 선생님 음악이 너무 좋은데 볼륨을 좀더 크게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음악이 들을만 합니까?"
그분은 웃으며 볼륨을 높여 주셨다
계속되는 음악은 소울풍 음악들이었고 가끔 블랙풍의 재즈음악도
섞여 있었다
두시간정도 음악을 들었는데 내가 아는 음악은 없었다
나도 음악께나 듣고 나름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처음듣는 수준 높은
음악이 전부였다
좀전까지 가이드가 들려준 트로트 음악과는 차원이 다른 음악들 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할때쯤 가이드의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아저씨가 내게 물어왔다
"아가씨는 전공이 이공곕니까 인문곕니까"
"네? 저는 아가씨가 이니고 아줌만데요?"
"아, 그래요ᆢ"
"전공은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인문계면 책한권 들릴까 해서요"
"무슨책 인데요?"
"제가 쓴 소설 입니다"
소설가 세요?
"주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그가 내민 소설이 "그대의 작은 바람숲" 이었다
읽지않고 가방에 넣어둔채 잊었는데 가방을 풀자 짐틈에서 튀어
나온 것이다
그대로 책상위에 던져 놓았다
휴가동안 쌓인 회사 업무들을 처리 하느라 분주하게 한주일이
후다닥 흘러갔다
내일은 주말이니 그동안의 피로를 풀겸 집에서 뒹굴뒹굴 구르며
쉬기로 작정했다
책을 펼쳐 아저씨의 프로필을 봤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등 수상 경력이 화려했다
발간된 소설집도 낯익은 제목이 많다
작가 이름을보니 그 아저씨는 아주 유명한 소설가 였다
뒷 표지쪽 작품평도 화려했다
저녁을 먹고 운동을 나갔다 온후 소설을 읽어 보기로 했다
결국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마지막 쪽 386페이지를 덮었다
호러와 판타지가 어우러진 절묘한 사건과 사고로 연속되는 결국 충격적인
반전과 결말로 끝을 맺는
로맨스 호러 장르 였는데 손에서 책을 내려 놓을수없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유리는 노트북을 켜고 프로필에 기재된 작가의 블로그를 찾아 들어갔다
아저씨의 자유게시판, 활동사항, 여행스케치, 사진작품, 문학평론, 발표된
작품들, 창작 강의 등
활발한 근황을 다 알수있게 블로그가 오픈되어 있었다
매일 발표되는 글들을 읽으며 이 사람이 글의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됐다
신랑이 아이와 함께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휴일에는 맘놓고 쉬라고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인근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을
다녀오는 중이다
본인도 쉬고싶을 테지만 날 위해 세심히 배려해주는 그런 그가 고맙다
저녁은 아이가 좋아하는 소세지 계란말이와 아빠의 된장찌게를 끓여놓고
세식구는 행복한 식사를 했다
날마다 출근하며 길건너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퇴근하며 아이를 데려오는 일을
한지 벌써 칠년째다
유리는 연로하신 부모님께 늘 죄송스럽다
내년에는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면 애와 친정 부모님을 위해 직장을 고만둬야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어느새 가을이 가고 초겨울 문턱이다
서리가 내리고 아파트 내에 감나무에 감이 빨갛게 익어 보도에 떨어져서
지저분하다
누가 따가는 사람이 없으니 까치밥이 안되면 모두 길가에 추락한다
주차된 승용차 지붕에 떨어져 깨진 연시를 하나 집어 먹어봤다
차고 달다, 너무 달다, 꿀처럼 달았다
그날 이후 오며 가며 승용차 지붕만
살피며 다니게 됐다
떨어져 깨진 연시를 줏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일은 종각 교보문고에서 열리는 출판 사인회에 다녀올 예정이다
정태준 아저씨의 신작 소설 "공허"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공개
사인회가 개최된다
6개월이 지나 다시보게 되는 셈인데 아저씨는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오늘 팀장회의에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쫑파티를 하기로 했지만
나는 출판 기념회에 가기로 작심해서 동료들의 원성을 들었다
출판 기념회場은 역시 유명작가 답게 엄청 붐볐다
책자에 사인을 받으려는 애독자들의 행렬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도 그 긴줄의 맨끝에 섰다
감색 수트를 입은 아저씨의 모습이 보인다
여행중에는 평범한 아저씨였는데 여기서보니 장소와 잘 어울리며
한층 멋져 보였다
인사하느라, 자필 사인 하느라 정신이 없다
30분쯤 기다리자 내 차례가 왔다
책을 작가앞에 놓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홍유립니다"
"네? 하며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본다"
"저ᆢ알아 보시겠어요?"
"아, 인문계 아가씨.. 아니 아줌마로 군요ᆢ"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ᆢ덕분에 책 잘봤습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다시오게 됐습니다"
새책 발간 축하드립니다
"대박 나시길 기도 할께요"
감사합니다 잘 오셨어요
"지금 이 바쁜시간 끝나면 따로 만나 차 한잔 해요"
"네 영광 입니다"
출판 기념회에서 안내한 인근 한식당에서 식사를 한후 아저씨와 나는
커피콩 냄새가 물씬나는 카페에서 콜롬비아 원두커피를 내려 마셨다
그후로 가끔 아저씨와 나는 만나서
소주잔을 기우리며 문학이나 음악이나 그림쪽에 해박한 예술적인
지식을 얻었다
늦는 날이면 회사 핑게를 대며 거짓말을 해야했고 아이와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십년이란 세월이 훌쩍 갔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까지 일지 우리도 모른다
이젠 남 같지않고 식구같이 남매처럼 가족같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언젠간 결론이 나야할 관계이므로 우린 불안한 시간도 많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체 하며 그렇게 산다
어느새 깊은 가을이다
나무도 피를 흘리나
수액이 가을이면 붉어지나
떨구는 비늘마다 붉은 빛
물고기는 산으로 가서 몸을 털고
나무들은 길바닥에서 화려하게 옷을 벗는데
세상이 핏빛 이구나
어디 호텔이던가 톡톡이를 타고
귀가 하던날 밤 노랠 들었네
세상이 다쳐 피를 흘린다는 걸
미쳐 모르고 살았네
나뭇잎이 물비늘이고
물고기 비늘이 핏빛이란걸
이제사 알았네
제니는 오늘도 진열대에 앉아
치앙마이 사진을 들여다 보고 붉게 우는데
산길 나무 비늘은 붉게 피를 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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