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오래된 비밀

시인화가 김낙필/자작나무숲 2021. 4. 18. 11:43

 

 

오래된 비밀

 


소설의 끝은 큰 반전 없이 심심하게 끝날 것이라는 걸 예감한다
하얀 햇볕 속에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여자는 배웅인지 마중인지 모를

빛 속으로 사라졌다
한낮에 햇볕은 강렬해서 눈을 멀게 했고 입 속의 박하사탕처럼 싸하게

저려왔다
그가 먼저 동쪽으로 떠난 후 내가 서쪽으로 떠나갈 차례임을 직감한다
터미널의 오후는 말없는 사람들의 발길로 고요하다
사선으로 길어지는 그림자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햇볕의 빛깔은 붉은색으로 변해간다
이별은 대개 느닺없이 일어난다
헤어지고 나서야 그게 마지막이었음을 깨닫는 일처럼 난감한 일은 없다
서쪽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서쪽 창에 기대어 무분별한 전선의 끝을

따라간다
가끔 까마귀 같은 검은 새의 흔적을 스쳐가기도 한다
서쪽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창밖으로 굵은 바람이 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지구 반대편에서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동쪽으로 떠난 그는 무사할까 괜한 걱정을 한다
비행기의 잔해는 처참하지만
숲과 호수가 아름다운 동네의 풍경은 기품 있고 조용했다
바람이 잔해 태우는 냄새들을 끌고 다녔다
잔인한 냄새는 풍경과 어우러지지 못했다

결국 소설의 끝은 쓸쓸하고 썰렁하게 끝날 것이라는 걸 안다
서쪽으로 가다 보면 동쪽으로 간 지구 반대쪽 어딘가에서 조우하게 될 그가
백발로 서서 손을 흔들 그곳
가도 가도 도달하지 못할 곳이다
영영 벗어나지 못할 그곳으로 가고 있다

아주 오래된 비밀들이 기다리고 있을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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